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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헤르만헤세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 by hermann hesse

by 벵갈고양이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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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르만헤세 소설 [싯다르타]  소개

 . 저자: 헤르만헤세

 . 1919년 작품 집필 시작. 일 년 반의 체험 기간을 거친 후 1922년 출간 [싯다르타. 한 인도의 시 (Siddhartha. Eine Indische Dichtung)

 

헤르만헤세-소설-[싯다르타]

 

 

 

 

2. 헤르만헤세 소설 [싯다르타] 감상 및 인상 깊은 문장

 

 헤르만 헤서의 [싯다르타]는 니코스 카잔찬키스의 "최후의 유혹"처럼 우리가 아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전기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소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아니었고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다.

  브라만의 아들인 싯다르타는 유독 영특하고 돋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언제나 배움과 깨달음에 대한 깊은 갈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떠나 사문들의 무리에 합류한다. 그곳에서 그는 또다시 수행에 정진하지만 그가 원하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어느 날 이미 깨달은 자라 불리는 세존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친구와 함께 그가 머무르며 깨달음을 전파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친구는 부처의 곁에 남기로 하였지만 싯다르타는 다시 길을 떠난다. 부처와 나눈 이야기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지만 깨달음은 말로써 전해질 수 없다는 것. 그가 원하는 배움이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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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카밀라 를 만나고 부유한 상인인 카마스와미의 밑에서 일하며 사랑하고, 많은 돈을 벌고, 탐닉하고, 빠져든다. 그가 한 수 아래라 여겼던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과 한치도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몇 년간 지속된다.

 어느날, 자신이 카밀라가 키우던 죽은 새라 여겨지던 날 싯다르타는 갑작스러운 떠남을 반복했던 과거처럼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그곳을 떠난다. 아름다운 카밀라와의 마지막 밤의 결과로 아이가 생겼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이번의 떠남이 이전과 다른 점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떠났던 과거와 달리 이번의 끝은 죽음에 닿아 있었던 점이다. 하지만 성스러운 옴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다시 깨어났고 그는 그가 도착한 강과 사공, 바주데바의 곁에 머물기로 한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에게 그간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이야기했고 바주데바는 묵묵히 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일하며 함께 살기로 한다.

 그 이 후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을 강물로부터 얻는다. 

p 155
그래요, 싯다르타" 그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 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배 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자식의 문제에 이르러 그 동안 깨달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한다면, 싯다르타도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모든 연의 굴레를 던진 것 같은 그였지만 자식의 문제에 이르러 싯다르타는 다시금 인연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다. 부처는  자식에게 "라훌라(방해자, 장애)"라는 이름을 붙인다. 다소 비정해 보였지만 자식에게 생기는 깊은 애정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p 183

싯다르타는 그 정원의 대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를 이 장소까지 오게끔 내몰았던 욕망이 어리석은 욕망이라는 것을, 자기가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아들에 집착하고 애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도망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마치 하나의 상처처럼 가슴속 깊이 느꼈으며, 이와 동시에 이 상처가 결코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쑤셔 놓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상처가 장차 틀림없이 활짝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늙어서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다시 만난다. 싯다르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배움을 이어가지도 않고 있지만 고빈다는 그가 범인이 아님을 깨닫는다. 말로써는 진정한 깨달음을 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귀퉁이를 살짝 본다면, 그것은 좋고 나쁨과, 선과 악 거짓과 진실, 모든 대립된 것을 넘어서도 모든 시간을 초월한 동시성이었다. 그가 보연 준 모습은 어쩐지 테드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있던 외계에서 온 생명체에 대한 깨달음 같기도 했고, '가 보지 못한 길이 없는' 중첩된 미시세계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p217
그러자 고빈다는, 가면의 이러한 미소, 흘러가는 그 온갖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이 단일성의 미소, 수천의 태어남과 죽음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이 동시성의 미소, 싯다르타의 이 미소야말로 자신이 수백 번이나 외경심을 품고 우러러보았던 바로 그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고 영락없이 똑같은 미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부처 고타마의 미소, 그러니까 그 한결같은, 잔잔한, 우아한, 측량할 길 없이 불가사의한, 어쩌면 자비로운 듯하기도 하고, 어쩌면 조소하는 듯하기도 한, 현명한, 그 속뜻을 가늠하기 힘든 신비한 미소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었다. 고빈다는 완성을 이룬 자들은 이렇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장르를 달리하는 영화 같고, 바주데바와의 동거에 들어가면 어쩐지 버디무비 같은 느낌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싯다르타와 바주데바는 길게 말하지 않는 사이이지만 미소와 귀담아듣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바주데바가 워낙에 비범하여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바주데바가 빛을 발하며, 부처가 되고 싯다르타가 놀라는 등의 할리우드식 엔딩을 상상하기도 하였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바주데바의 퇴장은 물결처럼 자연스러웠다.

 읽으며 가장 감동적인 장면도 바주데마와의 에피소드에 있었다.

 

p184
이렇게 응고된 듯한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던 그를 깨운 것은 어떤 손길, 그의 어깨에 닿은 어떤 손길이었다. 그는 자기 어깨에 닿은 이 손길, 상냥하고 수줍은 이 손길을 알아채자마자 금방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자기를 뒤쫓아온 바주데바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주데바의 다정한 얼굴, 마치 온통 미소로만 가득 찬 것 같은 그 잔주름들, 그 해맑은 두 눈을 보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처에게 귀의했던 고빈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강물의 소리만을 그토록 오랜세월 열심히 들어왔던 바주데바와 싯다르타였다. 기숙신학학교에서의 부적응과 1차 세계대전의 경험 등이 그에게 종교와 집단에 대한 환멸감으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싯다르타"는 동양사상, 구체적으로는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고 애정을 가진 것은 강물과 같은 동시성에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이며, 개인의 초월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깨달음은 말로써 전달되지 않으며, 종교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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